임자(壬子)[1723]년 6월 어느날 후손인 생원(生員) 진화(鎭華)가 소관이 있어서 원주로 가다가 경태(景泰) 년간(年間)에 三先生이 연명(連名)으로 쓰신 제명록(題名錄)을 관란(觀瀾) 元선생 후손 집에서 있었는데 조그마한 첩자(帖子)였다.
270여년이 지났음에도 그 글씨가 또렷 하였다.
다만 “景泰”란 대년호(大年號) 밑에 “모년(某年)”이란 두 글자는 좀이 먹어 알아 볼 수가 없었으나 ①진화(鎭華)가 그대로 베껴와서 자세하게 이야기 하였는데 또한 기이한 일이였다.
제명록(題名錄)을 남긴 뒤 세태(世態)가 여러번 변하였고 지나간 일들을 하나 하나 따져볼래야 증거를 잡을 수 없으나 이 첩자(帖子)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홀로 남았는데 곧 다른 분들의 문집(文集)과 우리 집에 있는 문적(文籍)들을 참고로 하여 보니 보이지 않는 기세(紀歲) 두 글자는 丙子(1456)년임이 분명 했다.
바로 세조가 단종(端宗)에게서 양위(讓位)를 받은 것이 乙亥(1455)년 여름이였고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하향(下鄕)한 것이 이 해였으니 가보(家譜)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②권동암(權東巖)이 지은 글 속에 선생의 나이를 21세라 하였으나 과연 확실하게 부합 되었다.
또한 ③신숙단(申叔丹)의 행장(行狀)과 묘지명(墓誌銘)을 참고하면 “丙子(1456)년 4월초에 성삼문(成三問)의 옥사(獄事)가 일어났다.“고 하였으니 이러힌점을 고려한다면 三先生의 제명록에 ”삼월기망(三月旣望)“이라 한 것은 틀림없이 六臣이 처형되기 전 약간일 임이 분명하다.
벼슬을 버리고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자 三先生이 잇달아 쓸쓸한 벽촌으로 내려온 것을 돌이켜볼 때 그 뜻이 무엇이였고 또한 어떤 일이였던가, 더구나 헌호(軒號)를 갖추어 설명을 기록한 점에 이르러서는 그 뜻이 어찌 단순히 유람(遊覽)의 한한가로운 발자취를 남겨 후일까지 잊지 않데 하기 위함이였겠는가.
후생(後生) 등이 옛일을 추노하는 감회를 이기지 못하며 삼가 제명첩(題銘帖)을 베껴 써서 선생을 사모하는 자료로 심을까 하노라.
시세(是歲) 九月 日 六代孫 徵道 지음
【註】
① 李鎭華(1677 ~1754)
字 : 長世 號 : 黙庵 羽溪人 生員 先生의 後孫
② 權東巖 : 東巖 權省吾(1587 ~ 1671)
③ 申叔丹[태종17(1417) ~ 성종6(1475)]
字 : ?翁 號 : 希賢堂 保閒齋, 高靈人,
1439년 문과에급제 “훈민정음” 창제시 공적이 컸다.
시호는 文忠.
인조22(1644)년 7세손이 영주군수(榮州郡守)로 있을 때 문집을 간행하였다.